경제활동
서산 천수만 간척사업을 진두 지휘하는 아산, 유조선으로 급류를 막고 흙을 붓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1984)
건설
온 나라가 굶주림에 허덕이던 시절,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를 세우기 위해 사회기반시설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목소리, 자본도 기술도 없다는 우려,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아산이 나섰습니다. 건설이야말로 좌절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해냈습니다.
한반도에 머물지 않고 세계 곳곳으로 나아가 폐허 속에 꿈을 세우고 번영을 일궈냈습니다.
최고의 건설회사로 도약한 현대건설은 토목, 건축, 생산기반 시설, 전기, 원자력 등 모든 건설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과 창조력으로 아산의 뜻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모든 것은 나에게 맡겨라.
겁이 나거든 집에 가서 누워 기다려라. ”
1974년 26만 톤급 VLCC 진수를 지휘하며
아산이 건설한 소양강 다목적 댐, 콘크리트댐 대신 사력댐으로 건설해 건설비를 대폭 줄였습니다. (1973)
소양강 다목적댐
홍수 조절을 위한 대규모 사업. 그러나 국내 시멘트 수급은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공사 경험도 부족해 다른 나라 기술자들에게 설계와 시공을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산은 우리 손으로 댐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주위의 불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양강 주변의 흙과 자갈을 이용해 사력댐을 건설해냈습니다.
현대시멘트 설립
건설 공사는 늘어갔지만, 국내 시멘트 생산량은 늘 부족해 수입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아산은 우리 손으로 시멘트를 생산해 문제를 돌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외국 자본과 기술의 도움 없이,
우리 힘으로 현대의 첫 생산 공장을 만들자! “
1963년에 첫 삽을 뜬 단양의 시멘트 공장은 이듬해 1964년에 준공되었습니다. 그리고 '현대건설의 3·1운동'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시멘트를 생산, 국내 건설업의 숨통을 틔웠습니다.
현대 시멘트 공장에서 직원들을 격려하는 아산, 시멘트 생산을 통해 국내 건설업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1965년 9월, 아산은 태국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을 맡아 국내 최초로 해외 건설 진출이라는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낯설기만 한 땅, 외국 노동자들과 함께 재래식 장비로 고속도로를 닦는 것은 크나큰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산은 공사를 완공하고 자신감을 얻게 됐습니다. 그 후로 해외 진출이 더 활발하게 되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물류를 담당할 고속도로 건설이 시급했습니다.
아산은 태국에서 고속도로를 만든 경험을 살려 공사에 나섰습니다. 철야 작업이 계속되고, 이익조차 잊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 6월 27일, 세계 고속도로 건설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인 290일만에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해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있는 아산, 세계 고속도로 건설 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완공되었습니다. (1970)
지도를 바꾼 대역사, 서산 천수만 간척사업의 마지막 물막이 공사현장(1984)
서산 척수만 간척
아버지의 꿈을 기억하며 바다처럼 드넓은 농토를 꿈꾸던 아산.
서해안을 막아 국토를 만들고
식량을 생산하자! “
이렇게 천수만 간척사업이 시작됐습니다. 석산을 개발해 바위를 실어 날라 바다를 메웠습니다. 유조선을 동원한 '정주영 공법'으로 마지막 물막이 공사를 끝내고,1억 400여㎡(울릉도의 1.3배)의 드넓은 농지를 만들어냈습니다.
주베일 산업항 건설
20세기 최대의 공사였던 사우디아라비아 산업항. 기술도 자본도 없는 후진국이라며 비웃던 세계를 향해, 아산은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공사기간을 8개월 단축시키겠다고 나섰습니다.
선진국 업체들을 이긴 낙찰.
최고 수준의 건설에 세계가 놀랐습니다.
또한 공사 선수금 덕분에 우리나라 외환 사정은 크게 개선됐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에서(1978)
“ 우리 어깨 위에 민족의 생사가 달려 있고,
그래서 우리는 실패할 수 없다. ”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계약 서명식을 가진 후
국내 최초 고유모델인 포니 신차 발표회장. 아산은 불굴의 의지로 자동차에 대한 오랜 꿈을 이루었습니다.(1985)
자동차
1940년, 아산은 자동차 수리업체 ‘아도서비스’의 문을 열었습니다.
남들은 열흘 걸리는 수리기간을 사흘로 줄였으며, 분해와 조립을 거듭한 끝에 자동차의 구조를 터득했습니다.
서울 장안의 자동차가 모두 몰려들 정도로 성시를 이뤘습니다. 일제의 강제 합병으로 사업을 접어야 했지만 청년 시절부터 품어 온 자동차에 대한 꿈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자동차는 그 나라 산업기술의 척도이며
달리는 국기이다. “
포드의 도움을 받아 자동차를 조립했지만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100% 우리의 힘으로
국산 자동차를 만들어내겠다! “
아산은 해냈습니다. 국산 자동차를 세계에 수출했습니다.
4개의 해외생산법인을 둔 현대자동차는 2007년 연간 판매량(국내·국외) 260만 대를 돌파했습니다. 아산의 꿈과 열정이 담긴 현대자동차. 오늘도 전세계 200여 개국에서 힘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국산 1호 자동차 ‘포니’ 생산
아산은 포드와 합작회사를 만드는 것을 중단하고, 우리 손 우리 기술로 국산 자동차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기술을 배울 곳이 필요했습니다. 아산은 유럽을 선택했습니다. 유럽 최고의 이탈리아인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고, 영국의 전문가와 중요 부품 제작 기술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들의 기술을 배우고 연마해 우리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75년 12월, 국산 1호 자동차가 태어났습니다.
포드와 결별한 지 3년 만에 우리 기술로 만들어 낸 국산 1호차 포니.(1975)
X카 개발 프로젝트
제2차 오일쇼크로 전세계가 불황에 빠지고 현대자동차 역시 큰 타격을 입은 1980년대 초. 불황을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한 아산은 이른바 ‘X카 개발 프로젝트’를 내놓았습니다. 4천억 원을 투자해 전륜 구동 고유모델을 개발, 미국시장에 본격 진출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해외업체로부터 기술을 배우고 공장을 지었습니다.
미국의 까다로운 조건에 맞춰 고치고 또 고쳐 나갔습니다. 그리고 1985년, 국내 최초의 전륜 구동 탄생! ‘포니’라는 이름을 달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팔려 나갔습니다. 아산의 혜안과 결단력으로, 현대자동차의 오늘을 열었습니다.
알파엔진 개발
엔진은 자동차의 심장입니다. 우리 손으로 자동차를 만들었지만, 엔진은 수입해 쓰고 있었습니다.
차를 만든 지 20년이 다 돼 가는데,
언제까지 남의 엔진을 쓸 것인가. ”
아산은 엔진 개발을 결심하고, 1983년 9월 ‘신엔진 개발 계획’을 출범시켰습니다. 중앙연구소를 설립해 국내외 인재를 모으고 해외로 기술 연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2년 만에 ‘알파엔진’ 시제품을 완성해 내,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기술 자립을 이룩했습니다.
해외 자동차 생산기지
미국과 캐나다에서 현대차의 인기가 꾸준히 계속됐습니다. 그러나 선진국들은 보호주의 장벽을 치고 다른 나라의 자동차가 시장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제약 조건을 만들곤 했습니다.
수출이 점점 어려워지자, 아산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1989년 캐나다 브로몽에 현지 생산공장 설립!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도약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현대자동차는 곳곳에 현지법인과 생산기지를 설립하며 글로벌 자동차회사가 되었습니다.
“ 바닷가에 소나무만 서 있는 백사장의 사진을 찍어가지고 다니며
‘이곳에서 배를 만들테니 사주시오’ 하고 다녔다. ”
1971년 현대중공업 초창기 일화에서
선박 건조 현장 스크루 위에서 근로자를 격려하는 아산. 아산은 현장 경영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1983)
중공업
그 동안 쌓아온 기술로
조선소를 만들어보자! “
비용도 기술도 만만치 않았지만, 아산은 또 한번 불가능에 도전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조선소를 만든다는 말에 모두들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도약의 뜀틀일 뿐.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산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투자전문회사와 은행, 배를 살 선주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지만, 아산은 자신 있었습니다.
결국 배 두 척을 수주하고 차관을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2년 3개월 만에 세계적인 조선소를 건설함과 동시에 26만 톤 급 초대형 유조선 두 척을 거뜬히 만들어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제 현대중공업은 FPSO(부유식 원유 생산 저장 하역 설비) 와 LNG(액화 천연 가스)운반선 등 첨단기술이 결집된 고부가가치 선박을 만들고 있습니다. 선박 건조량 세계 1위로, 1주일에 두 척씩 대규모 배를 만드는 현대중공업.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배 100척 중 15척은 현대중공업이 만든 것입니다.
500원 지폐와 롱바톰 회장
아무도 조선소를 지을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외국 자본을 얻어 자금부터 마련해야 했습니다. 투자전문회사인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난 자리. 그는 대한민국의 능력을 의심스러워 했습니다. 아산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습니다.
우리의 거북선은 영국의 조선 역사보다
3백 년이나 앞서 있었소.
우리의 잠재력은 녹슬지 않았단 말이오. ”
아산의 당당함에 롱바톰 회장은 마음을 열고 후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사업계획서가 내 전공이오’
영국의 버클레이 은행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은행 부총재는 아산의 전공을 물었습니다.
내 사업계획서를 보았소?
그 사업계획서가 내 전공이오. ”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는 아산의 자신감이 그를 감동시켰습니다. 다음 관문은 수출보증기구의 보증. 선박 주문을 받아오라는 말에 아산은 다시 배를 팔러 뛰었습니다. 초라한 백사장 사진 한 장이 그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산의 투지에 감동한 그리스 선박왕 리바노스. 그리고 26만 톤 유조선 두 척! 아산이 따낸 첫 수주였습니다.
세계 제일의 조선소
1972년 3월 23일, 현대울산조선소(현 현대중공업) 기공식. 그리고 밤낮 없는 공사가 이어졌습니다. 아산은 공사현장에서 거대한 조선소를 그려보곤 했습니다. 신발끈을 맨 채로 자다가 웅덩이의 빗물로 세수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1974년 6월 28일. 첫 삽을 뜬 지 2년 3개월 되던 날, 환호와 탄성과 함께 거대한 무쇠덩어리가 힘차게 파도를 가르고 있었습니다. 아산과 1만 7천여 명의 사나이들. 그들의 땀과 의지가 세계 제일의 조선소를 만든 것입니다.
현대중공업 시업식에서 사원들을 격려하는 아산(1973)
현대중공업 전경. 현대중공업은 중공업 분야의 기반으로서 국가 산업 발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