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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티지

생애와 철학

아산 정주영 사진

창조적 도전자, 아산 정주영

나는 인간이 스스로 한계라고 규정짓는 일에 도전하여 그것을 이루어내는 기쁨을 보람으로 기업을 해왔고 오늘도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아산은 1915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난을 이기기 위해 땀 흘려 일했으며, 기업을 키우고 잘 사는 나라를 건설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진취적 기상과 창조적 아이디어로 시대를 앞서 간 도전자! 아산은 사회와 국가의 앞날을 위해 고민한 애국자였습니다. 주변의 아픔을 감싸 안은 박애주의자였으며, 문화예술계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2001년 3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산은 우리의 든든한 거목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과 정신을 되돌아 보며 거울로 삼고자 합니다.

“ 나로서 최선을 다하는 그 혼신의 집중과 정열과
전심전령을 소진하는 질주의 기나긴 행로만이 있었다. ”

1981년 정주영 창업자가 일간지에 직접 기고한 글 중에서

피난지 부산 범일동에서 모친 한성실 여사와 함께 한 아산의 대가족(1963)

피난지 부산 범일동에서 모친 한성실 여사와 함께 한 아산의 대가족(1963). 첫째줄 좌측부터 정문숙, 김근수, 한성실, 정몽헌, 정몽우, 김윤수. 둘째줄 좌측부터 정몽근, 정몽구, 변중석, 정몽준, 정희영, 박병임. 마지막줄 좌측부터 김월계, 정세영, 정순영, 김영주, 정인영, 정신영, 정상영, 아산, 정몽필.

대가족의 가장, 아산

“ 너는 종손이다. 위로는 조상들 제사 받들어야 하고
아래로는 동생들 거느려 나가야 하지 않겠니? “

아산은 아버님의 말씀을 늘 가슴에 품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맏아들이라는 운명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주하지도 않았습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땀 흘려 일했으며, 대가족의 가장으로서 집안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존경 받는 가장', 아산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자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아산의 정신

인본주의

아산은 어렸을 적에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가난을 넘어서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일했습니다. 가난은 사람이 사람구실을 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을 저리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산은 사회가 넉넉하게 되고, 나라가 튼튼하게 번영하도록 하는 일에 평생을 다 바쳤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 사회,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또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뼈 속 깊이 겪었기 때문입니다.

아산은 먹고 사는 것이 마련되어야(恒産) 착하고 덕 있는 사람이 된다는(恒心) 것을 몸소 깨닫고 실천한 진정한 인본주의자였습니다.

도전과 개척정신

“지극하게 정성을 다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
아산은 정직과 성실로 쌀 가게를 물려 받았습니다.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신용을 기반으로 오늘의 현대를 이루어냈습니다. 자본도 기술도 없었지만 맨손으로 불가능에 도전했습니다. 길을 뚫고 댐을 쌓고 배와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뜻을 가지고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없다."
굳건한 의지와 개척정신으로 미래를 열어 나갔습니다.

쌀가게 복흥상회 주인 아주머니와 함께 한 청년시절의 아산의 모습(1930년대 중반)

복흥상회(福興箱會) 자전거와 아산의 부지런함

복흥상회에 취직한 지 3일째 되던 날, 아산은 쌀 한 가마와 팥 한 되를 배달해야 했습니다. 비가 질척질척 내리고 있었습니다. 자전거에 물건을 싣고 배달해보기는 처음. 비틀거리다가 그만 진창길에 나동그라졌습니다. 핸들은 휘고, 쌀과 팥은 진흙 범벅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흘 밤을 새우며, 쌀 가마를 싣고 자전거 타는 연습을 했습니다. 배달꾼 선배에게 기술도 배웠습니다. 아산은 누구보다 훌륭한 배달꾼이 되었습니다. 쌀 두 가마니를 싣고도 온 힘을 다해 핸들을 꽉 쥔 채, 어디든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 제일 먼저 일어나 가게를 쓸고 닦았습니다. 아산의 부지런함과 신용에 감탄한 주인 아저씨. 새 자전거 한 대를 사 주었고, 이후에는 쌀가게를 물려주었습니다.

근검절약

가난했던 어린 시절, 농한기 겨울에도 새벽부터 쇠똥, 개똥을 줍던 아버님, 서당 아이들의 오줌통을 모아 밭에 거름을 댔던 어머님. 그러한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어린 아산은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살림이 나아지고 생활이 안정되어도, 아산은 여전히 검소했습니다. 춘추복 한 벌로 일 년을 지내고, 구두에 징을 박아 30년을 닳고 닳도록 신었습니다. 걸어 다니는 것은 버릇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걸어 다니시면 운동화가 닳아서 자동차 기름 값보다 운동화 값이 더 드는 것이 아닙니까?“
정몽준 이사장의 물음에 아산이 대답했습니다. "운동화가 닳으면 폐타이어로 때워 신지."

아산에게 절약이란 보다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할 부를 축적하는 일이었습니다. 편안함과 안락함이 삶의 척도가 되어가는 시대, 평생 부지런하고 검소했던 아산의 삶에서 진정한 부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낡은 구두 3켤레 (닳지 않도록 징을 박고 굽을 갈아 30년을 신었던 아산의 구두들)

“ 기업하는 사람에게 제일의 무기는
세계에서 제일 성실하고 착하며 우수한 인재들이다. ”

정주영 회고록에서

현대자동차공업사 시절, 직원들과 금강산 구룡연에 올랐습니다. (1940년대 중반)

직원과 함께

기업은 인간을 위한 인간의 단체다! “

아산에게 직원들은 소중한 '가족'이었습니다. 뜨거운 여름 볕, 살을 에는 겨울 바람 속에서도 건설 현장의 직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직접 그들의 소리를 듣고 문제 해결에 나섰습니다. 직원체육대회에서 허리를 맞잡고 씨름을 하는가 하면 사원연수회에서는 밤새 술잔을 나누었습니다.

아산의 믿음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져 노사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가난한 농부의 8남매 중 장남인 아산, 어린 시절부터 가장이 되어 대가족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가족을 굶기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 화목하게 이끌어 가겠다는 결심, 스스로 약속을 지키고자 자신에게는 언제나 엄격했습니다.

재봉틀 하나를 유일한 재산으로 여기던 아내 변중석 덕분에 안심하고 일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아산은 자녀들을 엄하게 단련시키고자 매일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새벽 출근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가족을 돌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모두 더불어 행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족과 기업, 그리고 나라의 번영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마북리에서 가족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아산, 정몽구, 정몽준, 변중석, 1980년대 초)

소설 『토지』 완간 축하 케이크를 자르는 박완서, 박경리, 아산, 김형국(1994)

문인과의 교류

가난하고 힘겨웠던 소년 시절, 아산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보던 이장집으로 마실을 가곤 했습니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소설 이광수의 《 흙 》 을 읽으며 변호사를 꿈꿨고,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웠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살았지만 울산 바닷가에서, 때로는 해외 건설현장에서 문인들과 마음을 나누었으며, 여름이면 경포대, 안면도 등지에서 개최된 해변시인학교에 참가해 시를 읊기도 했습니다.

아산의 문학을 향한 열정. 덕분에 평생 순수한 소년으로 살았습니다.

"책을 읽다가 내 뜻과 일치하는 문장을 발견할 때, 나는 희열과 행복을 느낀다."

아산은 더 큰 행복을 찾아 소박한 언어를 다듬었습니다. 그는 진정 행복한 시인이었습니다.